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4개의 눈동자 (문단 편집) == 제작비화 == 1952년에 발표한 츠보이 사카에의 동명소설 “24개의 눈동자”를 각색하여 영화화한 작품이다. 1952년에 원작소설 발표직후 기노시타 감독은 소설을 접하고 바로 영화화를 결정하고 [[쇼치쿠]]에 영화기획을 알린다. 당시 같은 종류의 일본 영화치고는 제작기간이 유별나게 긴 편이었는데 영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24명의 아역들의 학교 수업일정이 큰 이유였다고 한다. 방학기간동안 촬영해야 했고 아역 12명과 이들이 성장해 청소년기의 배우들 12명, 성년기의 배우들 6명의 캐스팅과 촬영등을 병행해야 했음으로 제작기간이 유례없이 1년을 약간 넘겨버린 것이다. 당시 기노시타 감독이 직접 각색을 했는데 1952년 12월에 원작소설발표, 1953년 3월 촬영및 제작시작, 1954년 3월 촬영종료 및 후반기 작업시작, 1954년 9월 개봉으로 살인적인 제작스케줄이 이어져서 각색작업이 엄청난 스피드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더군다나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그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가 역시 주연을 맡은 “여자의 정원”도 감독하여 한창 촬영중이었다. 1953년에 2개 영화를 동시에 제작하고 있던 것이었다. 쇼치쿠 내에서는 “역시 천재감독은 다르다” 라며 한동안 기노시타 감독의 제작능력을 칭송하는 평판이 돌았다고. 그도 그럴것이 “여자의 정원”이 1954년 3월 개봉, “24개의 눈동자”가 당해 9월 개봉 예정이었으니 [[쇼치쿠]] 내부에서도 과연 예정대로 개봉이 될 수 있을지 염려가 팽배했던 것. 그러나 보란듯이 개봉일정을 예정대로 모두 맞췄고 “24개의 눈동자”와 “여자의 정원” 둘다 나란히 [[키네마 준보]] 1위,2위를 독식하며 작품성 또한 인정받았으니 [[쇼치쿠]]가 괜히 “천재감독” 운운한게 아닌듯하다. (더군다나 그때 3위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 였다. [[쇼치쿠]] 100주년 기념 홈페이지[[https://movies.shochiku.co.jp/100th/nijushinohitomi/]]에서는 “24개의 눈동자”를 홍보하면서 “구로사와의 ‘7인의 사무라이’를 앞선 작품성”이라고 대놓고 홍보하고 있다. 해외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위상을 생각하면 쇼치쿠의 이런 치기어린 패기가 어이없을 뿐.) 아역을 맡은 배우들 캐스팅도 당시에 주목을 받았다. 초등학교 1학년 역할로 12명, 그리고 6학년 역할로 12명 모두 24명의 아역들을 캐스팅해야 했는데 [[쇼치쿠]]가 일본 전역에서 닮은 형제,자매들로 3600조, 7200명의 일반 아이들을 수소문해서 사진촬영, 테스트를 거쳐 12조 24명을 최종 캐스팅했다. 그 당시에는 이런 대규모 캐스팅, 더군다나 아역에다가 외모가 닮고 5-6년 터울의 형제,자매를 선발하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었기에 [[쇼치쿠]]의 기획부서는 캐스팅에 진땀을 뺐다고. 거기다가 성년 역할을 해야하는 배우 6명도 일단 연기력은 뒷전이고 외모가 비슷해야 하는게 1순위여서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모인 인연 덕분인지 몰라도 이때 출연했던 아역들이 아직까지도 모여 동창회(?)를 열며 서로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모임의 이름은 “눈동자회”. 이들중 다수가 기노시타 감독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이 회상하는 “24개의 눈동자” 촬영현장은 학교에서 보냈던 시간들과 똑같을 정도로 즐거웠던 추억이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